문화 이야기

[책] 요시모토 바나나의 '허니문'

앙쥬89 2006. 3. 8. 23:15
요시모토 바나나 / 김난주 옮김 / 민음사

"무언가 치유되는 과정이란, 보고 있으면 즐겁다. 계절이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계절은, 절대로 낫게 변하지 않는다. 그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처럼,
낙엽이 떨어지고 잎이 무성해지고, 하늘이 파래지고 높아질 뿐이다.
그런 것과 흡사하게, 이 세상이 끝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기분이 나쁘다가,
그 상태가 조금씩 변화해갈 때, 딱히 좋은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어떤 위대한 힘을 느낀다. 갑자기 음식이 맛있게 느껴지고,
문득 불편하던 잠자리가 편안해지는 것은 곰곰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다.
고통은 찾아왔던 것과 똑같은 길을 걸어 담담하게 사라진다." (P131 중에서)


역시나 바나나 소설답게 뭔가 몽환적인 분위기다.
법적으로 결혼은 했지만 아직 미성년자인 마나카와 히로시
그리고 아무런 갈등도 없는 새엄마와 딸 마나카.
이상한 종교에 빠져 자식을 버리고 간 히로시의 부모와 그를 거둬 키운 할아버지.
그리고 히로시를 가족처럼 여겨줬던 마나카의 부모님.
그 어느 관계 하나 무겁지 않은게 없으나 소설은 가볍디 가벼운 느낌이다.
마치 어려움 이라던지, 관계의 무거움 이라던지 하는 게 모두 없어진
그냥 단순한 관계 그 자체만이 존재하는 듯 하다고나 할까...

현실에선 아마 이렇게 평온하게 하루하루가 지나가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다. 한편으론 '어차피 소설이니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정작 자신은 결혼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다고 어디선가 밝혔던 작가는
이 책에서 그 어떤 허니문보다 더 달콤하고 멋진 허니문을 그리고 있다.
뭐, 여행을 떠나게 된 동기는 히로시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슬픔에 너무 빠진 히로시의 마음을 추스르기 위한 것이었던 것이지만...
게다가 여행장소도 마나카의 친엄마가 사는 호주...
애 늙은이들 같았던 히로시와 마나카가 호주에서 돌고래떼들을 보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삶에 대한 불안감을 날려버리고 긍정적인 느낌을 갖게되는 부분은
이들 어린 부부에게 가장 큰 인생의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마나카의 친엄마가
젖먹이인 마나카를 두고 떠나게 된 사연을 말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어느 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집에 돌아가 봤더니, 아빠랑 지금의 엄마가 부엌에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면서 웃고 있쟎니. 음식 볶는 소리도 나고 맛있는 냄새도. 내 집인데,
내 쪽에 권리가 있는데도 말이지,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어. 너의 울음소리도,
둘이서 너를 달래는 소리도, 죽 밖에서 듣고 있었는데, 끝내 그 빛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어.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등장해 볼까, 나가라고 소리를 질러볼까,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오갔지,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들었어,
하지만 그 어떤 짓을 해봐야 이 공허함과 외로움을 메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 때까지 여러 가지 일들을 그럭저럭 넘겨왔지만, 이 일만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내가 나이고, 너의 아빠가 너의 아빠인 이상, 이건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고.
나는 망연자실해서, 내내 밖에서,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배를 쫄쫄 곯으면서,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일어났을 땐 더 이상 돌아보지 않았어.
야간열차를 타고, 수면제를 먹고, 밤바다로 들어갔지"

결국 마나카의 엄마는 수면제를 먹고 밤바다로 들어가서도 죽지않고 살아나왔다.
그 어떤 이끌림에 의해.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찾았다.
내가 마나카의 엄마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웃음이 나더라.
나 같으면...야간열차까지는 똑같이 탈 수 있었겠지만...수면제를 먹는 일도,
밤바다에 들어가는 일도 못 할 것 같아서...

허니문은 인생의 정점기가 아닐까.
여행마다 의미가 있고, 추억이 있지만...
그 어떤 여행도 허니문만큼 인상적이지도, 달콤하지도 않은 듯...

앙쥬...

(2006. 3)